배너 닫기
뉴스등록
RSS
자사일정
주요행사
네이버톡톡
맨위로

후손들에게/ 베르톨트 브레히트

시인 권순진의 시마을

등록일 2019년06월21일 16시37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기사글축소 기사글확대 트위터로 보내기싸이월드 공감 네이버 밴드 공유


 

후손들에게/ 베르톨트 브레히트

1
참으로, 나는 암울한 시대에 살고 있구나!
...
악의 없는 언어는 어리석게 여겨진다. 주름살 하나 없는 이마는
그가 무감각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웃는 사람은
단지 그가 끔찍한 소식을
아직 듣지 못했다는 것을 말해 줄 뿐이다.

나무에 관해 말하는 것이
그 많은 범죄행위에 관해 침묵하는 것을 의미하기에
거의 범죄처럼 취급받는 이 시대는 도대체 어떤 시대란 말이냐!
저기 한적하게 길을 건너는 사람을
곤경에 빠진 그의 친구들은
아마 만날 수도 없겠지?

내가 아직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믿어다오. 그것은 우연일 따름이다. 내가
하고 있는 그 어떤 행위도 나에게 배불리 먹을 권리를 주지 못한다.
우연히 나는 해를 입지 않았을 뿐이다.(나의 행운이 다하면, 나도 끝장이다)

사람들은 나에게 말한다. 먹고 마시라고. 네가 그럴 수 있다는 것을 기뻐하라고!
그러나 내가 먹는 것이 굶주린 자에게서 빼앗은 것이고,
내가 마시는 물이 목마른 자에게 빼앗은 것이라면
어떻게 내가 먹고 마실 수 있겠느냐?
그런데도 나는 먹고 마신다.

나도 현명해지고 싶다.
옛날 책에는 어떻게 사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 쓰여져 있다.
세상의 싸움에 끼어들지 말고 짧은 한 평생
두려움 없이 보내고
또한 폭력 없이 지내고
악을 선으로 갚고
자기의 소망을 충족시키려 하지 말고 망각하는 것이
현명한 것이라고.
이 모든 것을 나는 할 수 없으니,
참으로 나는 암울한 시대에 살고 있구나!

2
굶주림이 휩쓸고 있던
혼돈의 시대에 나는 도시로 왔다.
반란의 시대에 사람들 사이로 와서
그들과 함께 분노했다.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싸움터에서 밥을 먹고
살인자들 틈에 누워 잠을 자고
되는대로 사랑에 빠지고
참을성 없이 자연을 바라보았다.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나의 시대에는 길들이 모두 늪으로 향해 나 있었다.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도살자들에게 나를 드러내게 하였다.
나는 거의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배자들은
내가 없어야 더욱 편안하게 살았고, 그러기를 나도 바랐다.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힘은 너무 약했다, 목표는
아득히 떨어져 있었다.
비록 내가 도달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은 분명히 보였다.
이 세상에서 내게 주어진
나의 시간은 그렇게 흘러갔다.

3
우리가 잠겨버린 밀물로부터
떠올라 오게 될 너희들.
부탁컨대, 우리의 허약함을 이야기할 때
너희들이 겪지 않은
이 암울한 시대를
생각해 다오.

신발보다도 더 자주 나라를 바꾸면서
불의만 있고 분노가 없을 때는 절망하면서
계급의 전쟁을 뚫고 우리는 살아왔다.

그러면서 우리는 알게 되었단다.
비천함에 대한 증오도
표정을 일그러뜨린다는것을.
불의에 대한 분노도
목소리를 쉬게 한다는 것을. 아 우리는
친절한 우애를 위한 터전을 마련하고자 애썼지만
우리 스스로 친절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너희들은,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는
그런 세상을 맞거든
관용하는 마음으로
우리를 생각해 다오.

- 브레히트 선집 『나, 살아남았지』 (에프. 2018)
...................................................

1898년생인 브레히트가 1939년 덴마크에 망명해 있을 때 쓴 시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그 몇 년 전부터 쓰기 시작하여 그때까지 계속 보완되고 수정, 조탁되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이전보다 더욱 넓고 깊어진 안목을 읽을 수 있다. 견디고 이겨내지 않으면 안 되는 싸움에 대한 인식이 있고, 그 싸움에 자신을 내던지는 결연함이 있으며, 그 싸움의 끝은 지금과는 다른 세상이리라는 믿음이 버티고 있다. 지상에 함께 사는 존재들이 겪는 궁핍과 고통에 아파하면서 먹고 마시고 잠자는 일조차도 편치 않았던 사람들이 살았던 시대가 있었다. 그 시대를 지배했던 이념가운데 하나가 '코뮤니즘'임을 부인하지 못한다.

이 시의 후반부는 3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스탈린의 대숙청 시기의 고약한 냄새가 풍긴다. 그러니까 34년부터 36년까지의 1차 숙청, 36년부터 38년까지의 2차 숙청이다. 따라서 이 시는 그 시기에 쓰인 시라 할 수 있다. 그러나 훗날 역사에서 코뮤니즘은 처참하고 초라하게 자멸하였고, 그것이 내걸었던 긍정적인 가치들마저도 조롱과 경멸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 자본주의의 패악을 모르는 바 아니었기에 냉소주의는 깊어갔고 불끈 솟구친 개별적 욕망만이 당당한 시대를 맞았다. 그럼에도 근본에서부터 다시 시작하고 일어서보려는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고, 그래서 세상은 여전히 사람 사는 세상이다.

브레히트는 그 숙청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스탈린 체제에 대항하는 테러 음모를 꾸몄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그런 인식을 가졌기에 ‘후손들에게’와 같은 시도 쓸 수 있었으리라. 물론 그것은 불가능했고 대신 부평초처럼 떠돌았다. 그는 실제로 ‘구두보다도 더 자주 나라를 바꾸었다’ 1933년 망명길에 올라 체코슬로바키아와 오스트리아, 스위스와 프랑스를 거쳐 덴마크에 정착하는 듯했다가 1940년 나치를 피해 핀란드로 피신했고, 이후 시베리아횡단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거쳐서 배를 타고 미국 산타모니카에 정착한다. 1947년에는 매카시즘 열풍에 휘말려 반미행위조사위원회로부터 심문을 받은 뒤 프랑스로 향했다가 스위스로 건너갔다.

그리고 1948년에야 조국 독일로 돌아왔다. 그토록 고된 삶 속에서도 그가 어디에 있건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잃지 않았다는 사실은 놀라웠다. 브레히트는 망명생활을 청산하는 과정에서 두 개의 독일 중 사회주의 국가를 표방한 독일민주공화국을 선택했고 동베를린에 정착했다. 그는 나치 집권 이전부터 급진적 좌파 정치 운동을 지지했던 만큼 자연스런 선택이었다. 동독 정부는 브레히트에게 연극계 스타로써 그의 명성에 걸맞는 대접을 해주었다. 작품 활동을 위한 환경에 있어 당국의 전폭적인 지원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동독 당국의 문학계와 예술계에 대한 검열을 냉소하고 조롱했다.

브레히트는 독일민주공화국 체제와 더 나아가 소련 스탈린 체제에 대해서 그 문제점을 공공연히 비판하고 풍자했다. 휴머니즘 속에서 현실의 폭력성을 비판하고 전쟁의 참혹함을 고발하였다. 그러나 동독과 그 후원자인 소련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도 불구하고 죽을 때까지 반공주의자로 전향하거나 독일연방공화국을 지지하진 않았다. 어쨌든 그는 독일민주공화국과 그 후원자인 소련이 적어도 나치보다는 더 낫다고 여겼으며 독일연방공화국과 그 후원국들의 자본주의도 문제가 많다고 생각했다. 그렇듯 그의 생은 쇠잔함이 물씬 풍기지만 브레히트만큼 시대의 우울을 겪고서 우리에게 고뇌에 찬 진실의 언어를 잘 말해주는 사람도 드물다.

여기서 좀 생뚱맞지만 브레히트와 같은 해(1898년)에 태어난 조선의 김원봉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두 사람이 얼마간 닮아있다고 느껴지는 까닭은 무얼까. 그들은 “천박한 것을 증오해도 얼굴이 일그러지고, 불의를 보고 분노해도 목소리가 쉬게 된다는 사실을” 진즉에 깨달았어도, 브레히트는 연극과 시에서 세계의 비참과 시대의 암울함을 노래했고 김원봉은 행동으로 나섰다는 차이가 있다. 장택상의 지시를 받은 노덕술에 의거 노조총파업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체포된 김원봉은 ‘빨갱이 두목’이라며 뺨을 맞는 등 일제에서도 겪지 않았던 모욕을 당한다. 이후 좌우합작을 함께 추진했던 몽양 여운형마저 암살당하면서 극도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다.

국외 무장투쟁 28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온 약산도 브레히트와 같은 심정이었으리라. 1948년 4월 김구· 김규식 등과 함께 남북협상에 참여한 뒤에 그대로 북한에 남았다. 그때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분위기가 굳어진 상황이었다. 좌우합작이 실패한데 따른 실망에다 자기를 따르던 의열단원들이 거의 북쪽으로 돌아서 버린 점에 따른 동요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브레히트가 전적으로 동독을 신뢰하지 않았던 것처럼 김원봉도 북한이 내키지는 않았다. 결국 30년대 스탈린 대숙청과 같은 바람이 20년 후 북조선에서도 불었다. 1958년 김일성과의 정치 암투에서 패배하여 숙청되면서 생을 마감한다.

정치범수용소에서 청산가리를 먹고 자살했다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그리고 그의 유해는 북과 남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양쪽 모두에게 버림받는다. 상처가 된 역사는 누가 닦아주고 이상을 향한 그의 끝없는 투쟁은 누가 평가해줄 것인가. 브레히트가 ‘후손에게’ 남긴 저 편지에서 김원봉을 읽어낼 지점은 없을까. 의로운 일을 맹렬히 실행했던 약산 김원봉. 그가 남겨놓은 마음의 짐을 묵상하는 것이 정녕 무리이기만 할까. ‘인간이 인간을 도와주는 그런 세상’이 전적으로 도래하지는 않았지만 ‘관용하는 마음으로’ 그를 생각할 수는 없는 걸까. ‘살아남은 자의 슬픔’으로 우리가 먼저 증오와 분노의 강을 건너는 것은 어떠한가.
형남수 기자 hnsoo@daum.net 이기자의 다른뉴스
올려 0 내려 0
관련뉴스 - 관련뉴스가 없습니다.
유료기사 결제하기 무통장 입금자명 입금예정일자
입금할 금액은 입니다. (입금하실 입금자명 + 입금예정일자를 입력하세요)

가장 많이 본 뉴스

문화예술 축제관광 생태환경 인물칼럼



현재접속자 (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