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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시인 권순진의 시마을

등록일 2019년12월29일 10시07분 URL복사 기사스크랩 프린트하기 이메일문의 쪽지신고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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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문 강에 삽을 씻고 / 정희성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
우리가 저와 같아서
강변에 나가 삽을 씻으며...
거기 슬픔도 퍼다 버린다
일이 끝나 저물어
스스로 깊어가는 강을 보며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고
나는 돌아갈 뿐이다
삽자루에 맡긴 한 생애가
이렇게 저물고, 저물어서
샛강바닥 썩은 물에
달이 뜨는 구나
우리가 저와 같아서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한다

- 시집『저문 강에 삽을 씻고』(창작과비평사,1978)
............................................

삽질은 모든 육체노동을 대변한다. 노동은 사람이 세상에 참여하는 거룩한 방식 가운데 하나다. 그럼에도 값지고 정직한 노동의 가치는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기보다는 부당하게 취급당하기 일쑤다. 노동에 바치는 땀에 비해 여전히 그 대접은 소홀하다. 때로 그것은 열불 나고 통탄해마지 않을 노릇이지만, 시에서는 현실의 분노와 고통마저 저물녘 흐르는 강물 앞에 씻어내면서 오히려 삶을 정화하고 반추하는 계기로 삼는다. 꼭 육체노동자만 아니라 한해가 저물어가는 마당에 이러한 시로 삶을 위로받을 수 있다면 그 또한 다행한 일이다.

저문 강에 선 하루의 저녁은 인생의 노을과 같아서 ‘흐르는 것이 물뿐이랴’는 자조와 탄식 그리고 생의 달관을 절로 자아내게 한다. ‘삽자루에 맡긴’ 묵묵한 노동의 성실함을 누가 제대로 알아주랴. 대가가 못 미치는 노동의 고단함에 깃든 슬픔을 ‘쭈그려 앉아 담배나 피우’면서 삭이는 게 전부다. 그럴 때 강은 피곤했던 하루를 씻어줄 뿐 아니라 의연한 깊이를 보여주어 세상살이에 지친 이에게 위안을 준다. 저물고 저물어 어둠이 깊어 가면 비록 샛강의 썩은 물일지라도 캄캄한 세상을 밝히는 빛을 담아낼 수 있다.

그런데 참 이상도 하여라. 인간에 의해 썩어 가는 강에 비친 달에게서 노동의 피로와 우울함을 위로 받을 수 있다니. 삶이란 끊임없는 순환과 반복의 과정이다. 저문 강을 비추고 다시 돌아가는 달처럼 우리는 ‘삽을 씻고 먹을 것 없는 사람들의 마을로’ 기어이 다시 되돌아가야만 한다. 이 시가 발표되었던 70년대의 서정으로 돌아가 다시 시를 읽는다. 저문 강 흐르는 물에 삽 대신 때 묻은 손과 찌꺼기가 남은 귀와 눈을 씻는데 잘 씻겨 내려가지 않는다. 개인적인 일도 없지 않지만 모리배들에 의한 정치 불신이 육신을 짓누른다.

해마다 대학교수들이 뽑는 올해의 사자성어가 '공명지조(共命之鳥)'이다. 공명지조는 불교 경전에 등장하는 '한 몸에 두 개의 머리'를 가진 상상 속의 새를 말한다. 어느 한 쪽이 없어지면 자기만 살 것으로 생각하지만 결국 공멸하는 운명공동체로서 목숨을 함께할 수밖에 없는 새를 의미한다. ‘공명지조’를 올해의 성어로 추천한 영남대 철학과 최재목 교수는 "좌우 진영논리로 갈라져 심각한 이념의 분열증세를 겪으며 서로를 이기려 하고 자기만 살려고 하지만, 운명공동체란 사실을 망각한 한국 사회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선정하게 됐다"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닌데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를 진보와 보수의 극단적 대립만으로 파악한 게 타당한가란 의문은 남는다. 물론 지역 및 계층 간 격차로 갈등이 깊어진 시대상황은 ‘공명지조’를 떠올릴 만 하다. 그러나 정치에서 많은 부분은 진영 간의 각축이 아니라 옳고 그름의 문제가 아닐까. 정치인의 경우 다들 공감하지만 국익보다 사익을 위한 정쟁에 몰두한다는 것이다. 어느 쪽이 더 심하고 타락했는지의 차이겠으나 적어도 가짜는 솎아내야 한다. ‘어목혼주’ 물고기 눈이 진주와 섞여서 반짝이고 있으니 기가 찬다. 그래서 내년 총선이 중요하다.

지난해의 사자성어인 ‘파사현정(破邪顯正)’ 과거의 사악함이 척결되면 새 세상이 도래하리라 믿었건만 여전히 ‘임중도원(任重道遠)’ 어깨의 짐은 무겁고 가야 할 길은 멀다. 지난 20년간 교수신문이 선정한 사자성어는 밝고 긍정적이기 보다는 한결같이 부정적이고 걱정스러우며 우울한 우리의 사회상을 전달하고 있다. 하나하나가 다 우리사회의 단면을 비슷한 맥락으로 드러내었다. 그런 가운데 ‘삽자루’에 맡긴 서민들의 생애만 저물고 고통을 받고 있다. '흐르는 물에 삽을 씻고' '다시 어두워 돌아가야 할' 곳 역시 이 땅이기에 마음이 영 개운치 않다.

권순진

형남수 기자 hnsoo@daum.net 이기자의 다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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